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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위해 사랑으로 봉사하겠다

2014-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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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국회의원 윤석용 천호한의원 원장은 1951년 대구에서 한의학을 업으로 하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1살 때, 6?25전쟁 중에 유행하던 소아마비를 앓았고 목만 움직일 수 있는 중증장애인이 되었다.

정재원기자 jjw@

 

 

 
▲ 천호한의원 윤석용 원장(前 18대 국회의원/ 現 대한사회복지개발원 이사장)

윤석용 원장은 청년시절, 스스로가 장애인임에도 장애인과 소외받는 이를 위해 살아가라는 소명을 느끼고 평생 이들과 동행하기로 다짐했다. 사회의 그늘진 곳곳에서“더불어 잘 사는 세상 만들기”를 실행하며 살아가던 윤 원장은 뜻하지 않게 18대 국회의원 재직시절 상대 정파의 정략으로 인해 억울한 재판을 받게 된다. 이로 인해 현실 정치와 거리를 두었던 그는 대법원 최종 판결결과 무죄로 평결 받았다. 그가 가는 길이 옳다는 강한 믿음 때문이었을까? 그를 모략했던 상대에 대한 어떠한 원망도 보복도 하지 않고 다시 봉사와 사랑 실천의 길을 가고 있는 윤석용 원장의 행보가 다시 한번 국민들에게 감동으로 전해지고 있다.

개업 초기부터 무료진료 등 이웃봉사 실천
윤석용 원장은 “대학시절, 어렵게 들어간 경희대 한의학과라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고 말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갈등은 그를 빈민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만들었다. 결국 시국사건에 연루되어 제적처분을 받고 6년간 학교를 떠나 있어야 했다. 당시 윤 석용 원장은“포장마차, 건축노동자, 타일판매상을 하기도 했지만 훗날 어려운 사람들의 고충을 이해하는 큰 자산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1980년에 대학에 복학한 뒤 한의사자격증을 취득했고, 1981년에 강동구 천호동에 ‘천호한의원’을 개원하였다. 개업한 후에 그는“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만들기”라는 뜻을 실천하기 위해 수입의 10분의 9를 사회에 환원했다. 윤 원장은“한의원 개업 이후 밤 11시까지 정신없이 바쁜 진료가 이어졌다.

천호한의원은 서울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한의원이 될 정도로 바빴지만 한의사가 되면 이웃봉사를 하겠다고 하나님께 서원드린대로 개업 초기부터 무료진료를 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그는 이어“‘더불어 잘 사는 세상 만들기’는 아픈 몸을 치료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했다”며 “일주일에 한 번씩 난지도, 양평, 미사리 등을 순회하면서 20년간 무료 진료를 하였고, 천호한의원에서도 저소득층, 장애인 등을 대상으로 무료 진료 활동을 계속하였다”고 말했다. 당시 서울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중에 한 곳이 강동구 하일동(현 강일동)이었다.

윤 원장은 1981년에 『아기천사방』을 설립하여 운영하였고, 1992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장애아동과 비장애아동의 통합교육기관인 『곡교어린이집』을 설립하였다. 윤 원장은 “밥상공동체가 있는 곳에 ‘더불어 잘사는 세상’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고, 1985년부터 고덕, 상일초등학교 결식아동에게 하루 평균 70여 명씩 도시락을 직접 만들어서 제공했다. 또한 새벽시간에 천호동 인력시장에 모이는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조식을 제공하는 등 서민생존 도우미 역할도 했다.

나눔은 배가 되는 것, 아파트 한 채 없지만 더 부유한 기쁨을 갖고 있다.

 

 

 
 

“장애인은 가장 도움이 필요한 계층이었다”고 생각한 윤 원장은 1995년부터 1997년까지 『장애인공동작업장』을 설치·운영하였다. 또한『장애인결혼생활 지원센터』를 운영하였고, 장애아동 조기교육기관인 『디딤돌교육원』을 만들어 조기교육 등을 제공했다. 서민들을 위한 지원사업들은 주로 1983년에 설립된 『강동사회복지개발원』을 통해서 추진되었다. 1992년에 사재 10억원을 추가로 출연하여 사회복지법인『대한사회복지개발원』으로 전환시켰다.
또한 장애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목욕이라고 생각하여 해외를 순방하고 자료를 모아 손수 이동목욕차량을 만들었고(발명특허취득), 우리나라 요양보호시스템의 효시가 되었으며『성내종합사회복지관』의 위탁운영을 통해 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복지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이런 사회복지활동의 결과 뜻하지 않게 윤 원장은“자랑스러운 서울시민상”(서울특별시장), “자랑스러운 「신한국인」상”(대통령), “국민훈장 목련장”(대통령) 등을 수상 했다. 윤 원장은 그의 생각과 철학을 담은 『사계절의 울음』, 『그래도 지금! 곧! 다시』 등 시집을 발간했다. 그는 또한 『복지시대』라는 잡지 발간을 통하여 복지관계자들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전문적인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고 사회현안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하였다. 또한 그의 경험과 학술적 연구를 종합해서 2002년에 출간한 『개인 맞춤형 복지시대』는 대학교재로 사용된 적이 있다. 윤 원장은 또한 장애인들에게 새로운 방식의 삶에 대한 동기를 주고 싶어 장애인체육활동을 시작했다. 장애인생활체육협의회를 창립하고, 그 회장직도 맡았다. 또한 서울시장애인체육회 부회장으로 일해 왔으며, 선거를 통해 대한장애인체육회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윤 원장은 그 동안 사업이나 한의원 운영을 통하여 얻은 재산의 대부분을 사회에 환원하였다. 그 동안 무료진료사업, 어린이집 운영사업, 장애인 재활사업, 사회변혁운동 등에 투여한 재산은 어림잡아 70~80억 원(98년 환산)으로 알려졌다. 윤 원장은“본인 소유의 아파트 한 채 없으며, 1억 7천만원에 아파트 전세를 얻어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재산이 수백?수천억원 되는 사람들보다 더 부유한 기쁨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나눔은 반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배가 되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낀다”며 “국회 의정활동의 중심은 소외계층문제의 해결책을 찾는 것이었다.“현장중심, 사람중심의 해결책을 찾고 싶어 많은 곳을 직접 찾아가 사람을 만났으며, 그 곳에서 들은 아픔과 분노를 국회에서 해결책을 찾고자 했다”며 “이것이 제18대 국회의원으로서 4년간 보건복지위원회에서만 상임위 활동을 했던 이유”라고 말했다.

윤 원장은 또한 여성가족위원회와 예산결산위원회에서 의정활동을 하였으며, 일자리창출특별위원회, 민생안정대책특별위원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 한나라당 빈곤없는나라만드는특별위원회에서 활동하였고 총 90개의 법안을 대표 발의하였다. 이러한 활발한 법률 발의 활동으로 국회사무처에 의해 3년 연속 법안발의 우수의원으로 선정되었고, 법률소비자연맹이 주관하는 제18대 국회 대한민국헌정 우수상을 수상했으며, 270여개의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국정감사 NGO모니터단으로 부터 국정감사 우수의원상을 3회 수상했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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