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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ㆍ운동권ㆍ한의사 출신으로 빈민운동, 장애인 봉사활동에 앞장 서

2009-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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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링크

⊙ “아침부터 재수 없게 ‘병신’이 들어왔다”는 얘기 듣고 아내가 무릎 꿇고 명함 돌려
⊙ 소아마비로 하반신 장애 불구하고 17시간 동안 서서 선거운동
⊙ 朴正熙 대통령의 전화 덕분에 경희대 한의대 합격
⊙ 1982년부터 천호동에서 무료진료 한의원 운영

尹碩鎔
⊙ 1951년 대구 출생.
⊙ 대구 계성고, 경희대 한의대 졸업. 중앙대 사회개발대학원 석사.
⊙ 천호한의원장, 대한한의사협회 부회장, 現 한나라당 장애인위원회 위원장,
    경희대 한의대 외래교수, 한나라당 국회의원.
⊙ 자랑스러운 서울시민상, 자랑스러운 신한국인상(대통령), 국민훈장 모란장.
⊙ 저서: 〈개인맞춤 복지시대〉 〈한약목욕치료〉 〈사상의학의 현대임상적 응용〉.
 
국회 의원회관 앞에서 전동 스쿠터를 타고 있는 윤석용 의원.
  지체장애 2급인 尹碩鎔(윤석용·58) 한나라당 의원은 이번 18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윤 의원은 지난 16대 총선에서 당 공천을 신청했지만 탈락했고, 17대 총선에서는 공천을 받았지만 1300여 표 차로 낙선했다. 18대 총선에서 다시 비례대표 유혹을 받았지만, 이를 뿌리치고 강동을에서 출마해 당선됐다. 그는 “장애인이 선거를 치르고 국회의원에 당선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며 “나의 당선으로 장애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시선이 많이 부드러워지기를 바란다”고 했다. 18대 총선에서 장애인 국회의원은 모두 8명, 이 가운데 윤 의원을 포함해 2명이 선출직이다. 게다가 이번 총선에서 유일한 한의사 출신 국회의원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지난 2008년 11월 30일 오후 1시30분, 윤석용 의원은 국회의사당 귀빈식당에서 한나라당 장애인위원회 전국 모임을 가졌다. 그는 전국에서 올라온 장애인위원회 위원 50여 명과 인사를 나눈 후, 자신의 전동 스쿠터에 몸을 실었다.
 

 
 
 
  윤 의원은 엘레베이터를 이용해 의사당 정문으로 내려가 기다리고 있던 승합차에 올랐다. 의사당에서 100여m 떨어진 의원회관 정문에서 다시 목발을 짚고 차에서 내려, 스쿠터로 갈아탔다. 국회 내에는 스쿠터가 다닐 수 있는 통로가 곳곳에 마련돼 있어, 스쿠터를 운전하는 게 어렵지 않아 보였다.
 
  “우리나라도 이제는 장애인들을 위한 시설이 잘 갖춰져 있지 않냐”고 물어 보자, “내가 지난 6개월 동안 국회 내에서만 50곳의 시설을 장애인용으로 바꿨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지난 3년간 한나라당 장애인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습니다. 그동안 국회 안의 화장실 시설을 장애인용으로 ‘개·보수’하자고 건의했는데 안 됐어요. 이번에 제가 원내에 들어오자마자 화장실 개·보수부터 했습니다. 그렇게 49곳의 시설을 바꿨어요.
 
  마지막으로 ‘국회의사당 올라가는 빨간 카펫 깔린 계단에 장애인용 손잡이를 만들자’고 했더니, ‘안 된다’고 해요. ‘왜 안 되냐’고 하니, ‘국회 권위에 금이 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렇다면 국회의장을 장애인 차별법 위반으로 고발하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계단에 손잡이를 설치해 주더군요.”

 
  국회 의원회관 401호인 그의 의원실을 방문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애인들이었다.
 
 
  눈물바다가 된 당선 축하 만찬장
 
  “장애를 안고 평생 세상과 싸워 왔지만, 선거 운동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었어요. 한번은 제 명함을 돌리기 위해 가게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주인 표정이 안 좋게 변하는 겁니다. 그래서 명함을 두고 돌아서는데, ‘이런 ××, 아침부터 재수없게 병신이 들어오는 거야’라는 말이 뒤꼭지에 박히더군요. 그 후부터 아침에는 절대로 가게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제 선거운동하겠다고 다른 사람 기분 망치면 안 되잖습니까? 제가 들어가지 못하는 곳에 제 처가 들어가 무릎 꿇고 명함을 건넸습니다. 집사람이 참 고생 많았죠.”
 
  지난 2008년 4월 22일 한나라당 총선 당선자들이 부부 동반으로 청와대 만찬에 초청을 받았다. 윤 의원의 부인 辛明子(신명자)씨는 만찬장에서 장애인 후보자의 선거운동이 얼마나 힘든지를 얘기하며, 이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신씨의 이야기에 李明博(이명박) 대통령 부인 金潤玉(김윤옥) 여사 등 많은 참석자들이 눈물을 흘려 만찬장이 눈물바다가 됐다.
 
  그는 서두에 이런 말을 꺼냈다.
 
  “지난 총선 때, 제가 병역기피를 했다는 공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2급 장애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병역면제가 됩니다.
 
  그런데 후보자 소개에는 ‘병역 미필’로 나와 있어요. 여성은 병역면제라고 나와 있어서 오해가 없지만, 병역 미필자로 나오면 마치 병역을 일부러 회피한 사람이 됩니다. 저를 모르는 유권자들은 저를 안 좋게 생각할 것 아닙니까. 지난 17대 총선 때, 제가 1300여 표 차로 떨어졌는데 부재자 투표에서 1000여 표 차이가 났어요. 군대 가 있는 유권자들이 오해할 수밖에 없겠죠.”
 
  ―거리에서 선거운동할 때 힘들지 않았습니까.
 
  “현행 선거법상 후보자와 배우자, 보좌관 1명 등 3명이 후보자의 명함을 돌릴 수 있습니다. 저처럼 장애를 가진 사람은 한쪽으로 지팡이를 짚어야 하니까, 명함을 줄 수가 없어요. 상대 후보는 3명이 명함을 돌리는데, 저는 2명이 나눠주는 꼴이잖습니까.
 
  그래서 제 선거운동원들이 대신 명함을 돌리는데, 이게 위법이라고 계속 고발을 당하는 겁니다. 매일 고발당하고 매일 과태료 50만원씩 물어야 하니 하루하루가 초상집이었어요.”
 
 
  “윤석용씨는 그 몸으로 선거운동 하겠어요?”
 
윤석용 의원과 가족들.
  ―장애인 후보들은 출발선부터 뒤처져 있는 거군요.
 
  “제가 다리가 아파서 평소에 30분 이상 서 있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선되겠다’는 생각에 보통 14시간, 최대 17시간까지 서 있었습니다. 새벽 4시부터 지하철역, 공원에 나가야 하는데 어떻게 앉아 있겠어요. 그렇게 서 있다가 밤에 집에 들어가면 다리가 빳빳하게 굳어서 구부러지지 않는 겁니다. 스스로 침을 놓아도 밤새 통증이 와서 한숨도 못 잤습니다.”
 
  2004년 17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의 서울지역 공천 후보자 1차 심사에서 15명이 통과됐다. 그런데 한나라당에서는 14명만 발표했다. 발표되지 않은 1명이 윤석용 의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면접까지 올라갔습니다. 당시 李文烈(이문열)씨가 심사위원장이었고, 洪準杓(홍준표) 현 원내대표 등이 심사위원으로 앉아 있었어요. 제 차례가 됐는데, 어느 면접위원이 ‘윤석용씨는 그 몸으로 선거운동하겠습니까’라고 물어 봐요. 그 말을 듣는 순간 피가 거꾸로 돌더군요. ‘내가 1997년부터 한나라당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데 아직도 이런 질문을 받는건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뭐라고 답했습니까.
 
  “‘내가 이 몸으로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갔고, 한의사 됐고, 아들 둘 낳아 잘 키웠고, 지금도 하루 4시간씩 선거운동합니다’라고 소리쳤죠.
 
  그랬더니, 어떤 여성이 웃으면서 박수를 치더군요. 그 여성이 羅卿瑗(나경원) 의원입니다. 나 의원은 따님이 몸이 불편해서 同病相憐(동병상련)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날 저녁에 공천을 받았습니다.”
 
  윤석용 의원은 한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 한쪽을 쓰지 못하게 됐다. 소아마비를 처음 앓았을 때는 목 밑까지 마비되어, 입만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고 한다. 그가 현재처럼 목발을 짚고 걸을 수 있는 정도로 된 건, 그의 어머니와 외할머니 덕분이다.
 
  어머니와 외가의 따뜻한 보살핌 덕분에, 어린 시절 윤석용 의원은 자신이 장애를 입었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그를 자신들과 같은 아이들로 여겼고, 몸이 아픈 그를 등하굣길에 업어 주면서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선생님들도 혼자 화장실에 가지 못하는 그를 업어서 화장실에 보내 주었다.
 
  그러나 1960년대 대한민국에서 장애인은 결코 정상인과 같을 수 없었다. 중학교 진학을 앞둔 그에게, 장애는 거대한 모순, 이길 수 없는 天刑(천형)으로 다가왔다.
 
  “대구에서는 공부를 잘하면, 경북중이나 사대부중으로 진학했어요. 저는 성적이 좋았다고 생각됐는데도 그 학교에서 받아주질 않는 겁니다. 저보다 성적이 못 했던 친구들은 입학을 했는데도 말입니다.”
 
  윤 의원은 기독교 학교인 계성중학교에 입학했지만 학교가 성에 차지 않았다. 계성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학교 공부는 손을 놓고, 책과 사색에 빠져 살았다.
 
 
  朴正熙 대통령 도움으로 경희대 한의과 진학
 
국회의원실 앞에서.
  대학 입시를 치른 후, 윤 의원은 경북대와 연세대 공대에 지원했다. 두 학교는 장애를 이유로 입학을 거부했다. 아들의 진학이 또 다시 좌절되자, 윤석용 의원의 어머니는 ‘한의대 입학 시험을 보자’고 제안했다.
 
  당시 한의학과는 경희대 한 곳밖에 없었다. 한의대에서 장애인을 받아줄지 의문이었지만, 윤 의원의 어머니는 한의사는 몸이 불편해도 앉아서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아들을 몰아댔다.
 
  “한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어요. 그런데 이게 집안 내력인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저희 증조부(윤영렬)께서 고종 때 御醫(어의)였습니다. 그 덕분에 집안 대대로 한의학을 했죠.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약방을 했고, 친척 가운데 의사, 약사, 한의사가 많아요.”
 
  윤 의원은 1971년 경희대 한의대 입학시험을 치렀다. 필기시험은 통과했지만 신체검사에서 탈락했다. 그 외에 다른 장애인 수험생 10여 명도 있었는데, 모두 탈락했다.
 
  그가 신체검사에서 떨어지자, 당시 중앙정보부 감찰실장이던 윤 의원의 외삼촌 牟聖鎭(모성진)씨는 자신과 친했던 실력자 陸寅修(육인수) 前(전) 공화당 의원에게 조카의 입학을 부탁했다. 육인수 전 의원은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陸英修(육영수) 여사의 오빠로, 당시 국회 교육위원장이었다. 육인수씨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윤 의원에 관한 이야기를 했고, 박 대통령은 경희대 측에 윤석용 의원 입학을 지시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이 한마디 해 줘서 장애인 수험생 중 저 혼자 합격했습니다. 당시는 대통령이 한마디 하면, 뭐든지 바꿀 수 있는 시대였잖습니까. 제가 시험을 잘 봐서 부정입학을 시킨 건 아니니까 가능했죠. 외삼촌과 박정희 대통령이 제 은인이죠. 아무튼 제가 경희대 한의학과의 첫 장애인 학생 기록을 세웠습니다.”
 
 
 
 
대학시절 학생운동 참여
 
  박정희 대통령 덕분에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윤 의원은 학교 공부는 제치고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후배들 끌고 데모하다 경찰서나 중정에 끌려가면, 조사관들이 ‘너는 이 새끼야, 각하의 은혜를 입은 놈이 왜 유신을 반대하는 거냐’면서 더 많이 때렸습니다. 그때마다 외삼촌이 얘기해서 풀려 나왔어요.”
 
  ―당시 그렇게 박정희 대통령이 싫었습니까.
 
  “그때는 정말 박정희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새마을 운동도 정권연장 수단이라고 생각했고, 경부고속도로는 턱도 없는 소리였고, 포항제철·현대중공업 이런 회사는 전부 재벌들 배 불리려는 수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정말 존경합니다. 그 어른이 없었으면, 대한민국은 북한처럼 망했을 겁니다.”
 
  경찰서를 전전하던 윤 의원은 1975년 동료 수십 명과 함께 대학교에서 제적을 당했다. 윤 의원이 제적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윤 의원의 부친은 그날로 자리에 누웠다.
 
  아버지까지 병 져 눕자 윤 의원이 가족들을 부양해야 했다. 그는 고향인 대구에 내려와서 타일 판매업을 시작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1980년 서울의 봄이 오자 그는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다. 1981년 졸업 후 그는 한의학 공부를 계속하다가 천호동에 한의원을 열었다.
 
 
  장애인이 가장 빈민층이라는 걸 자각
 
자신이 만든 장애인 이동목욕차량 앞에 있는 윤석용 의원(앞줄 왼쪽).
  ―천호동에서 개업하신 이유가 있나요.
 
  “천호동은 당시 서울에서 가장 못살던 동네였어요. 무허가 판자촌, 재래식 시장, 사창가, 비닐하우스 등으로 뒤덮여 있던 곳입니다. 제가 한의사로 실력은 별로였지만, 돈이 없어서 병원 진료를 못 받는 사람들에게 무료진료를 해주고 싶었어요.”
 
  그는 무료진료를 하는 동안, 우리 사회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 자신과 같은 장애인들이었다. 그들은 빈민 가운데 빈민이었고, 한국에서 살지만 우리 국민이 아니었다.
 
  “저는 장애인 가운데서 선택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장애인이 아닌 것처럼 장애인들의 처지를 외면하고 살았어요.
 
  그런데 빈민운동한다고 돌아다녀 보니, 장애인들이 가장 어려운 사람이더군요. 특히 이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게 목욕이었습니다. 혼자서 목욕을 할 수 없으니, 1년 내내 한번도 못 씻는 겁니다. 냄새가 나니 사람들에게 무시 받고 사람으로 대접을 못 받고 살아가는 겁니다.”
 
  윤 의원이 운영하는 천호한의원에 들어서면 안내 데스크 뒤로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아래 사항에 해당되는 분은 치료비를 내지 마세요. 생활보호대상자, 중증장애인, 환경미화원, 소방관, 사회복지사, 집배원, 순경, 목회자, 그 외 원장님과 잘 아시는 분―꼭 내시겠다면 이동 목욕봉사차량 성금함에 정성을 모아 주세요.’
 
  윤 의원은 ‘이 땅의 장애인들에게 목욕만큼은 자유롭게 해주겠다’고 다짐하고 1985년부터 이동 목욕차량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윤 의원은 직접 일본·미국·유럽을 돌아다니면서 이동 목욕차량 기술을 배웠다. 가장 어려운 기술은 목욕차량에서 지하수를 뽑아 올려 자동으로 물을 데워 주는 기술이었다. 그는 한국 기술자들을 외국에 보내 이 기술을 배워 오게 했다. 1992년 그는 국내 최초로 장애인 이동 목욕차량을 제작 공급했다.
 
  윤석용 의원은 1983년 강동사회복지개발원을 설립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연간 1억~2억원씩, 한의원을 운영해서 벌어들인 돈 가운데 세금과 가족들 생활비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 복지개발원에 넣었다. 이 때문에 그는 아직까지 자신과 가족 명의로 집 한 채 가지고 있지 않다.
 
 
 
“국가가 장애인들을 거지로 만든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선거유세를 하고 있는 모습. 왼쪽이 부인 신명자씨.
  1992년에는 천호한의원 건물 등 자신의 전 재산 10여 억원을 기증해, 강동사회복지개발원을 사회복지법인 대한사회복지개발원으로 확대 개편했다. 대한사회복지개발원은 성내종합사회복지관을 지어 장애인과 저소득층, 아이들에 대한 종합복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성내종합사회복지관 산하에는 디딤돌교육원과 곡교어린이집이 있다.
 
  곡교어린이집은 국내 최초로 장애아와 비장애아들이 통합 교육을 받는 어린이집이다. 3개월 영아에서 초등학교 2학년 어린이 250여 명 가운데 약 20%인 50여 명이 장애아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적인 시선이 없어지려면, 어릴 때부터 함께 생활하도록 해야 합니다. 곡교어린이집에서는 두 살짜리 아이들이 서로를 도와주고 이해하며 살아요. 옆에 녀석이 밥 먹다 흘리면, 비장애인 아이가 대신 주워 줘요. 장애인 아이가 치약을 못 짜면 비장애인 아이가 친구의 칫솔에 치약을 올려줘요. 어릴 때부터 그렇게 살면, 장애인을 부족한 놈, 모자란 놈이라는 생각을 못하게 됩니다.”
 
  ―우리 사회가 장애인을 어떻게 도와줘야 한다고 보십니까.
 
  “장애인을 무조건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문제입니다. 제가 가장 곤란한 게 오른손으로 목발을 짚고 다니는데, 저를 도와주겠다고 달려와서는 오른팔을 잡아요. 목발을 짚어야 하는데 오른팔 잡으면 움직이지 못합니다.”
 
  ―자생력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이 뭡니까.
 
  “장애인은 대부분 기초수급대상자로 한 달에 100여 만원씩 받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이 일을 할 수 있는데 일을 안 해요. 장애들인들이 게을러서가 아니라 기초수급대상자들은 조금이라도 수입이 생기면 자격조건이 박탈되기 때문입니다. 국가에서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장애인들의 자생력을 빼앗는 겁니다. 기초수급대상자인 장애인들이 수입이 생겨도 정부지원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자생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윤석용 의원은 2009년부터 철폐되는 장애인 LPG 면세문제에 대해서도 “근시안적이고 편견 어린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정부에서는 장애인 차량의 LPG 면세혜택을 거둬 가면서 ‘차를 보유한 장애인들은 잘산다는 의미 아니냐? 잘사는 사람들에게 면세혜택을 줄 필요가 있느냐’는 논리를 폈습니다. 비장애인들은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할 수 있지만, 장애인들은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기 어렵거나 불가능할 때가 많아요. 장애인들이 생산적으로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차는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인생은 장애다”
 
  ―정부 예산이 적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 아닙니까.
 
  “盧武鉉(노무현) 정권 때부터 우리 복지 현실이 너무 열악해졌습니다. 노무현 정권의 386들은 감성적인 복지정책을 폈어요. 한마디로 포퓰리즘이죠. 구체적인 재원확충 방안 없이, 모든 사람이 잘살아야 한다는 식으로 자아도취가 돼서 마구잡이로 복지정책을 남발했어요.
 
  윤 의원은 “인생 자체가 장애인이 되는 과정”이라는 얘기를 여러 번 했다.
 
  “제가 국회에 들어와서 국회의원들을 모두 가리키며 ‘모두 예비 장애인들’이라고 했습니다. 나이 들면서 이빨 빠지고, 허리 힘 없고, 무릎 아프면 장애인 되는 겁니다. 장애인들이 계속 장애인으로 살아가면, 이들은 사회불만 세력이 될 수밖에 없어요. 사회불만 세력은 언제나 민주주의의 적이 된다는 걸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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